내 인생 최고의 영화 베스트 5, 혹은 최고의 감독이나 배우를 꼽아 보라 등의 주문을 하는 기자들은 이제 더 이상 내 곁에는 없다. 이 점에 대해 나는 공식적으로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야 마땅할지 모르겠으나, 내심으로는 그 상투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압박스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그것은 옷을 너무도 사랑하는 여인에게 천사의 날개 같은 눈부신 의상 100벌을 입어 보게 한 후, 그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과연 그녀는 올바른 정신 상태로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그러나 , 그러한 압박을 무릅쓰면서까지 내가 자발적으로 즐겨 하는 작업이 있으니 그것은 나만의 영화 속 명대사 리스트 만들기이다. 그 중 내가 주저 없이 1위로 올려놓는 것이 바로 ‘살인의 추억’  속 송강호의 대사이다. 지하 취조실에서 TV ‘수사반장’ 오프닝을 보는 씬에 나오는...  

“ 저 노래가 좋아... 노래가!”

자! 이 얼마나 기막힌 대사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그와 후배 형사는 조금 전, 기억하는 것이라곤 향숙이 팬티 밖에 없는 좀 모자란 녀석을 용의자랍시고 붙잡아 놓고 무작정 두들겨 패며 자백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그들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장면을 한 그릇 씩 들고 ‘수사반장’을 보기 시작한다. TV 속 형사들의 활약을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는 이 시골 형사에게  지금은 그야말로 자긍심 충만의 순간이다. 보라! 갑자기 자비심마저 발동하며 용의자에게 군만두도 권하고 있지 않은가. 급기야, 그는 자신의 음악적 감수성을 뽐내는 오버까지 감행하게 되는데, 자장면과 노란무를 한꺼번에 우적우적 씹으며 내뱉는 이 명대사는 이렇게 탄생한다. 다소 빈약한 악기 편성의 ‘연주곡’을 당당히 ‘노래’라고 표현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순진무구함이야말로 연쇄 살인을 잉태할 수밖에 없을 혼돈과 그 시대적 부조리함을 가장 날렵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모든 영민한 설계 뒤에... 봉준호가 있었다.

억새풀이 가득한 들판이 와이드 샷으로 잡히고, 한 여인이 등장 한다.
맥없이 걷는 걸음에 얼굴에는 기묘한 슬픔이 가득하다. 와이드 샷이라 그의 작은 몸집은 더욱 고립돼 보인다. 잠시 후 그 얼굴이 천변만화의 꿈틀거림을 보이더니 그녀는 느릿느릿 마치 무슨 씻김굿 같은 막춤을 추기 시작한다.
슬며시 묵직한 어거스틱 기타가 끼어든다. 굿판에 기타가, 더구나 놀랍게 부드러운 선율로.
이 짧은 서곡과도 같은 오프닝부터 새로운 봉준호가 떠오르고 있다.
영화 ‘마더’에서 그는 좀 오만해 보인다. 관객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끌고 다니다 갑자기 벌판에 횡 하니 내치는 식이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그 자신감이 좀 못마땅할 정도인데, 쉽지 않은 그것을 제대로 가능하게 하니 시기심인지 뭔지 좀 더 언짢다. 마지막 포장을 헤쳐 내기 직전까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진실은 그렇다 치고,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단순 진실게임은 아니지 않느냐... 넌지시 묻는 엔딩은 숨이 턱 막힌다. 그래서 , 은근히 부아가 날 법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두 손뼉은 격렬히 마주 치고 있다. 이건 경배인가, 아첨인가...

새끼를 돌보는 어미의 본능은 어쩜 가장 쉬운 이야기 소재일지 모른다. 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만국 공통어 같은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영화 ‘마더’의 모성애에는 한 모금의 농약 같은 죄책감이 섞이면서 더욱 복잡한 내면의 엄마로 탄생한다. 이제 그 만큼 컸으면 의지의 대상이 될 법한 아들이지만 아직도 한 침대에서 자며 잠들기 전엔 엄마 젖가슴도 만지고 있는, 정신보다 몸이 훌쩍 커 버린 녀석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선 한 시도 평강이란 찾아 볼 수 없다. 담벼락에 오줌을 쏟아 놓고 있는 아들에게 끝까지 한약을 먹이고, 녀석이 훌쩍 떠난 그 자리를 널빤지로 슬쩍 덮는 게 그녀의 인생이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 믿고 있다.
(남이) "한 대 까면 ?”... (난) “두 대 깐다.”
그들만의 교리문답을 반복해도 아들은 물론 그녀도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아들은 살인 피의자 신분으로 엄마 앞에 선다. 그녀가 다시 힘을 내 또 다른 ‘엄마’의 면모를 보여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후의 얘기는 익히 아시는 바대로 아들의 무기력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엄마의 사투라고만 해두자. 그리고 먼저,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봉 감독의 스토리 텔링 솜씨가 역시 스릴러의 전형이란 점부터 주목하자. ‘살인의 추억’을 ‘추억’하게 만드는 익숙한 씬들. 밤의 골목길, 그것도 늘 추적추적 비가 오는. 또, 그 안을 훑으며 떠다니는 스테디 캠, 하나의 소동극이 돼 버리기 일쑤인 현장 검증의 ‘현장’, 도무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경찰 등... 이제는 봉준호 씬, 봉준호 샷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감각의 결정체들은 더욱 견고하고 독창적인 작가의 세계를 구축한다. 의도된 바 종반부 직전까지도 관객들을 골목 안 미로로 바삐 끌고 다니던 감독은 우리를 갑자기 앞서 말한 그 황망한 벌판으로 내몬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 모두의 ‘엄마’가 홀로 서 있다. 달빛 아래 더욱 창백해 보이는 낯빛에 주름살마저 바래 보이는 그 고단한 얼굴을 마주하자 우린 그저 할 말을 잃고 눈물만 왈칵 쏟을 밖에...  

봉준호 감독의 진보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어 보인다. 다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탈피라 말하고 싶다. 사회 현상 속에 뒤틀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때론 연민으로, 때론 냉소로 그려내던 감독이 이번엔 한 꺼풀 벗고 좀 더 알몸에 가까워졌다고 할까? 신을 떠난 인간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죄와 그 죄의식의 굴레를, 우리 모두의 평생 마음의 빚쟁이인 엄마와 뒤섞어 그리며, 희미하게나마 구원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진보는 내적 깊이를 뜻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 “엄마는? 엄마 없어?”와, 바로 이어지는 “울지 마라!” 이 두 마디 대사에 가격 당한 나는 아직도 정신이 혼미하다. 무방비 상태에서 맞은 두 방의 연타!

봉 감독 너무했다. 수미쌍관으로 장치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춤, 그리고 이병우의 기타 선율... 역시 두 엄지를 세울 수밖에 없는 명품이다.

그리고, 김. 혜. 자...

2주 전만해도 내 머리 속엔 영화 ‘박쥐’를 완전히 장악한 ‘김 옥 빈’ 만 가득했다. 이 당찬 여배우의 재능과 수고는 좀 더 열렬히 보상받아 마땅하다. 이제 전직 대통령의 서거는 뒤로하고 다시 그녀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 말하고 싶을 정도. 그런데, 이 어린 여배우의 뿌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내공을 뿜어내시는 ‘김 혜 자’ 님의 발현은 기막힌 타이밍의 신구세대 랑데부 비행에 다름 아니다. 이미 ‘뿔 난 엄마’로서 지존의 모습을 보이신 그녀지만, 특별히 더 와이드 해진 대형 화면 속에서 만나는 그녀는 마치 100년에 한 번 피는 꽃처럼 우리를 흥분시킨다. TV, 그리고 김수현에만 가두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가 백일하에 드러난 이번 사건(?)은 한국 영화의 축복이다. 유독 클로즈 업 샷을 수시로 들이대는 봉 감독의 카메라를 이토록 완벽히 받아내는 여배우가 지구상에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짐짓 약해 빠져 보이는 그녀의 카리스마는 도대체 뭘까? ‘형언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라는 대본을 보고 황당했다는 그녀의 말대로, 그렇다... 그녀 자체가 ‘형언하기 힘든’ 배우인 건 아닐까.  비루한 삶임을 너무도 잘 알지만 아들을 위해 꾸역꾸역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엄마의 자세도, 증거품이라고 엉뚱한 골프채를 들고 황급히 숲길을 달리는 모습도, 마주한 진실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란 걸 알아 버린 순간에도 그녀는 완벽했다. 하긴  한국 영화를 심히 낮게 보던 건방진 소년 시절 나의 기억에도 영화 ‘만추’의 김 혜 자‘는 이미 대단한 품격의 여배우 아니었던가.혜자 님! 페닉 룸의 조디 포스터보다, 더 리더의 케이트 윈슬렛보다, 또, 모든 자신의 영화의 메릴 스트립보다... 당신이 더 배우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