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인정할 여유와, 가능한 변화에 도전할 용기, 그리고, 그 둘을 분별할 지혜를 주소서”
영화 ‘레이첼, 결혼하다’의 약물 중독자 치료 모임에서 하는 기도이다.
언니 결혼식 참석을 위해 이틀 동안 중독자 치료 쎈타를 나온 킴(앤 해서웨이)은 그 ‘둘’ 중의 딱 가운데 지점에 있었다. 이제 막 불가능을 인정하고 가능한 변화로 가기 위해 용기를 낸 그녀지만 그게 그리 수월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 부딪쳤다가 튕겨져 나오는, 그저 과잉행동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뻔뻔한 ‘똘끼’만으로 버티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현실에 다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이 말한다. “정말, 힘들다!”

그런데... 굳이 비교하자면, 대한민국 충북 예산의 조필성 형사는 지금 그녀보다 더 힘들다. 일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것이, 어찌하다가 군 단위 경찰서에게는 턱없이 버거운  탈주범과 조우했고, 실컷 두들겨 맞아 기절까지 한 건 그렇다 치고, 녀석이 그의 돈을 갖고 튀었다. 그것도 3개월 정직 기간을 버티게 해 줄 소싸움 판에서 딴 돈을. 더구나, 밑천으로 들어 간 돈은 탈주범보다 더 무서운 아내의 통장에서 몰래 빼낸 것이었다. 정말 큰일 났다 싶은 게 초등생 딸아이가 엄마의 진노를 전하며 하는 말.
“그러게 왜 거기까지 손 대고 그랴~아? ...”
그의 기도가 부족해서 일까? 이 짐을 온통 혼자만 져야 하는 그에게는 애초에 불가능을 인정할 여유나 가능한 변화의 용기란 말 따위는 그저 송아지 껌 씹는 소리와 다름 아닌 것이고, 이제부터 그가 움직이는 모든 동기는 오로지 ‘절박해서 혹은 쪽 팔려서’다. 그렇다. 남자든 여자든 하찮은 말싸움에만 지더라도, 며칠이고 혼자 거울 앞 가상 리턴매치를 하며 분을 삭이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우리의 가증스런 연기력은 대개 이런 순간 다듬어진다.)
아무튼, 조필성 형사의 ‘절박한 쪽팔림’은 그를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 뚝심 있게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두 번째 조우에서 손가락까지 잘리며 진정 불가능의 뒷태를 보았건만, 그저 못 본 척 가능한 변화에 도전하는 용기를 낼 뿐이다. 이후 이야기 전개는, 과하지 않은 과장과 설득력 있는 억지, 신선한 진부함이라는 언어의 유희와 함께 가는데, 이런 말장난적 열렬 지지를 이끌어내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정말 “재밌다”는 것이다.
살인적인 충청도 사투리의 개그 본능을 앞세워 맛깔스런 양념을 계속 뿌려 대는 조연들, 여기에 힘입어 사골 국물 같은 우직함을 열심히 우려내는 주인공, “50:50으로 나누자”에서 절정을 이루는 재밌는 대사들,(바로 이어지는 대사를 절대 놓치지 마시라.) 한 스푼의 설탕 같은 사랑, 한 숟가락의 된장 같은 가족애 등, 오락 영화의 절대 요소들을 충실히 함유한 이 제품의 진짜 이름은 ‘재밌는 거북이, 달린다’ 혹은 ‘거북이, 재밌게 달린다’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년 주연상 6관왕이라는 김윤석은 이제 ‘추격자’의 후광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자칫 ‘추격자’의 동어반복이 될 뻔 한 이 역할에서 미묘한 차별성을 찾아내는 세밀한 내공을 보여 준다. 좀 늦게 도착했을 뿐 의심할 여지없는 주연급의 중견 연기자임을 증명한다. 탈주범 역의 정경호의 날 선 카리스마도 성공적인데, 못지않게 눈이 가는 곳은 친구이자 예산 건달 역 신정근의 위치다. 연륜 있는 목소리와 적절히 들고 나는데 유연한 그의 존재감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선우선.  그녀의 매력에 이미 푹 빠진 나의 주관적 견해를 철저히 배제하고도, 이 영화가 ‘내조의 여왕’보다 나중에 만들어 졌다면 그녀의 등장 씬이 두 배는 많았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영화 속 그녀가 행복해 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를 발견한 그 순간의 민망함이란...
모 영화 주간지 기자의 리뷰는 이 영화를 약자가 근성과 용기를 발휘해 결국 승리하는 일종의 장르영화라 정의했다. 그런데, 이런 ‘뻔한’ 장르 영화는 뒷부분이 약간 변태를 일으켜야 재밌는데 그러지 못했단다. 탈주범 송기태가 너무 강하고 멋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다음 몇 가지를 상기해 보자. ‘리썰 웨폰’의 멜 깁슨은 순식간에 권총을 빼앗아 분해해서 내팽개치는 이연걸을 결국 쇠꼬챙이로 수장시켜 버린다. ‘프레데터’의 아놀드는 투명 갑옷을 입고 레이저를 쏘아대는 절대 막강 외계인을 진흙을 뒤집어쓰고 물리친다. 결정적 한방은 통나무. ‘파고’의 사투리 겁나게 쓰는 만삭의 여자 경찰서장도 혼자서 희대의 엽기 살인마를 잡는다. 비교해서, 최선을 다해 달리는 거북이에게 내러티브의 변태까지 요구하는 건 좀 무리한 요구란 얘기다.

그런 기자의 까다로운 안목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하고 싶은 말,
이 역시  ‘레이첼, 결혼하다’에 나온다.
“한 잔은 많아도 천 잔은 부족하다.”
물론, ‘거북이 달린다’는 넘치게 재밌는 ‘한 잔’이다.

아니, 재밌게 넘치는 ‘한 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