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벌써 한 주가 후딱 지나갔습니다.
새해에는 지난해 마무리되어야 할 미뤘던 일 몰아치듯 해결해 나가려했지만, '했지만'으로 하루하루 지나보내고 있네요. 쉽지 않군요. 물꼬가 터지면 봇물 터지듯 콸콸 쏟아낼 수 있을 거 같건만 답답할 뿐입니다. 

  올해 들어 '선약'은 잡지 않았습니다. 미루던 일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그랬던 거지요. 그랬건만 사람 만나는 일은 여전했습니다. 덕분에 송일곤 감독도 싱어송라이터 김현철도 만나긴 했지요. 일 한답시고 약속 잡지 않고, 다른 일도 접어두고 몰두하려 했던 계획은 이제 접었습니다. 여느때처럼 할 일 다 하면서 '미루던 일'에 몰두하려 합니다. 가능하겠지요. 멀티태스킹(mukti-tasking,다중작업)은 제가 그간 해왔던 작업형태, '평소모드'로 돌아가려한다는 겁니다.

  '평소모드' 핑계로 요즘 영화도 보고 있습니다.
대중교통 이용해 이동하면서, 잠자리에 누워서, 책상머리에서 짬짬이 끊어본 영화는 '책 읽어주는 남자'입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원 제목은 '더 리더(The Reader)'군요. 번역 제목도 괜찮은 거지요. 제 생각엔 '책 읽어주는 꼬마'라 해야 맞을 거 같긴합니다. 이렇게 번역했으면, 아마 '나 홀로 집에'처럼 꼬마 아이가 못된 어른 골려주며 설치는 영화로 오인되었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름다운 영화.
'타이타닉(외래어 표기법상 바른 표기는 '타이태닉'입니다)'으로 유명한 케이트 윈즐릿은 아름답습니다. '타이타닉'의 매력있는 외모는 뒷전, 푸석한 얼굴의 윈즐릿이 오히려 아름다웠습니다. 줄거리는 아시지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열다섯 소년과 서른을 넘긴 여인의 성애(性愛)에서 시작된 인연. 모질게도 이어집니다. 전차 개찰원인 한나(케이트 윈즐릿)는 성실하고, 지혜롭고, 자존심 강한 여인이지만 글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입니다. 우연히 만나 애욕에 빠진 소년을 두고, 어느날 한나는 홀연히 떠나갑니다. 세월이 흘러 전쟁은 끝나고 소년은 법대생이 되지요.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과 여자를 가르쳐준' 여인을 법정에서 봅니다.   

  이쯤에서 제겐 신파극 '검사와 여선생'이 떠올랐습니다. 엉뚱하지요?
나치 하수인으로 법정에 선 한나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걸 드러내기 싫어 무기징역 형을 감수합니다. 이때, 소년이 '그는 문맹이다, 무고하다' 외쳐주면 좋았을까요?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법정에서, 소년은 눈물만 뚝뚝 흘립니다. 아니, 소리없이 눈물을 꾹꾹 씹어 삼키지요. 어느새 소년은 변호사가 됩니다. 여기서 또 '검사와 여선생'이 생각날만 하지요. 제 수준이 이렇습니다. 영화 속 변호사는, 하지만 '책 읽어 주는 남자'의 길을 택할 뿐. '책 읽어주는 남자'는 카세트 테이프와 녹음기로 한나에게 다가 서지요. 그러던 어느날, 문맹인 한나가 교도소 도서실을 찾아 갑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빌릴 수 있나요...."

  침대 위에서 시작된 수십년전의 인연은 그렇게 한나의 문맹을 깨뜨립니다. 
더 레이디 위드 어 독, 녹음기에서 울리는 어절을 손가락으로 꼽아 세어본 한나. 빌려온 책에 활자로 박힌 제목의 낱말 개수를 셉니다. 1,2,3,4,5. The Lady With a Dog. 

  이후 한나는 '소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짤막한 편지. 끄트머리는 늘 '꼬마(Kid)'라고 쓰지요. 그 뒷 얘기는....

  꼭, 반드시, 안 보면 후회,  일부러, 제발, 놓치지 말아야 할, 이런 권유는 하지 않겠습니다.
어쩌다 기회되면 '책 읽어주는 남자'를 잊지 마시라는 얘기 일 뿐....

덧붙임 1 :  한나의 문맹을 깨게 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Chekhov)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체컵(콥)'이라 읽지요. 이 책을 보면, 영화 속 한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이가 있더군요.

덧붙임 2 : '책 읽어주는 남자'를 <우리말일기>로 삼은 까닭은 외래어 표기, 특히 러시아어표기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배우 이름 '케이트 윈즐릿(Winslet)'은 '- 윈슬렛'과 '-윈슬릿'이 혼용되기도 하지만  정부언론외래어심의 공동위원회(이하 '심의위') 제 22차 회의(1998년 6월 17일)에서 '-윈즐릿'으로 확정했습니다. '타이타닉'에서 공연한 '꽃미남' 배우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니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입니다. 심의위 1차 회의부터 지난해말까지 결정사항은 여기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www.korean.go.kr/08_new/index.jsp

덧붙임 3 : 디카프리오가 아니라 디캐프리오? 네, 맞습니다. 현지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게 현행 외래어표기법이거든요. 러시아어 표기법은 2006년에 비로소 확정 됐습니다. 몇가지만 짚어볼까요.

  고골리(작가) - 고골
  브레즈네프(정치가) - 부레즈네프
  하바로프스크(땅이름) - 하바롭스크
  무소르그스키(작곡가) - 무소륵스키
  푸슈킨(작가) - 푸시킨
  루빈슈타인(피아니스트) - 루빈시테인
  효도르(운동선수)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작가) - 도스토엡스키
  차이코프스키(작곡가) - 차이콥스키
  예프게니 오네긴(소설,발레제목) - 예브게니 오네긴

(러시아권의) 문학, 음악 공부 다시 해야겠지요? 뒤에 쓴 게 외래어표기법에 다른 겁니다.
러시아어 표기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여기로 가시지요.
http://www.korean.go.kr/08_new/index.jsp

덧붙임 4 : 책은 읽었지만 영화는 보지 않았다는 서른 즈음의 누구는 '영화도....?' 하며 말꼬리 흐리더군요. 



윈즐리의 젖가슴과 소년의 특정 신체부위가 노출되긴 합니다만,  에로틱한 영화는 아닌 듯 하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