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래 달리기'를 했습니다. '엠비시 이에스피엔 한강 마라톤'에 나선 거지요. 10킬로미터, 하프, 풀 코스 중에 10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불과(?) 10킬로미터. 보잘 것 없는 기록이긴 해도 풀코스 완주 경험이 있는 제겐 그럴만 했습니다. 그래도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쉬엄쉬엄 달린다는 생각으로 오래 달렸습니다. 기록? 1시간 20분쯤 되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볼 일 보며 뛴 기록치고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위하고 있습니다.

  오래 달리기를 마치고 함께 달렸던 동료 아나운서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출판 기획 일을 하는 후배 한명이 합석했지요. 생선구이와 막걸리 한잔. 미사리에서 달리기하고 밥 먹으러 지하철 타고 간 곳은 강남구 신사동. 여유있게 점심을 먹고 집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봄날 길거리 구경도 하고 백화점 지나칠땐 '시장구경'도 하며, 그렇게 집에 왔습니다.

  모처럼(?) 식구들과 저녁을 먹었지요. 다 큰 아들녀석은 밥상머리에서 쉬지않고 '수다'를 떱니다. 학교에서 농구한 얘기, 친구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또 어떻고, 내일은 국어시험을 보고, '기가(기술-가정)은 별로 재미없고.... 여전히 아버지 앞에 얘기 보따리 풀어놓는 아들이 고맙습니다. 아빠는 그저 '잘 들어주는 것'말고는 딱히 대꾸도 않는데 말입니다. 밥상 물린 뒤, 딸아이는 공부하다 말고 쪼르르 제게 달려왔습니다. 아빠, 이게 뭐야? 발음은 어떻게 해? 이 말 뜻은 뭐야? 이러저런 문제의 답을 구하려했던 거지요. 근데, 혼자서도 맞힐 수 있는, 이미 알고 있는 문제도 들고 오는 거 같았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딸이 아빠를 찾는데.... 고맙고 귀여웠습니다. 귀찮다,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금세 더 자라 아빠를 찾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 아홉시를 넘겨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한 딸은 책 한권을 읽어 달랍니다. 한권 통째로? 아닙니다. 한달전쯤 제가 사 놓은 그림책 '넉점반'을 읽어달라는 거였지요. 윤석중 선생이 쓴 동시. 제가 어릴때, 지금은 오십을 바라보는 형이 읊곤하던 시였습니다. 당시 기억이 가물거리던 차에 '풀버전'이 궁금해 주문해놓은 책이었습니다.

  책이 배달되고도 한동안 '넉점반'은 제 책상 위에 그냥 놓여있었습니다. 늦은 귀가 탓에 딸 베갯머리에서 읽어줄 기회가 없었던 거지요. 그리고 한참 뒤 그럴 기회가 왔습니다. '넉점반'을 읽어주겠다, 했더니 '이미 읽었더'는 답이 왔습니다. 아빠 책상 위에 놓인 책이 눈에 띄어 단숨에 읽은 뒤 제 자리에 반듯하게 모셔놓았던 것. '넉점반'은 '아빠책'이었던 거지요. 그 책을 오늘 또 읽어주었습니다. 윤석중 선생이 1940년에 썼다는 동시 '넉점반'.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밤."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윤석중 선생의 동시 '넉 점 반'의 '풀버전'은 이랬습니다.
그림책의 그림을 그린 이는 1966년생. 이제 마흔을 넘긴 화백입니다. 그림이 정겹더군요. 마지막 장의 그림이 특히 그랬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막내 젖 물린 채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엄마. 검정 고무신 한짝 벗어내며 마루에 오르는 빨간 치마저고리의 '아기'. 여닫이 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방에선 언니와 오빠들이 저녁을 먹고 있네요. 바깥 벽에는 키가 걸려있고 벽 안쪽에는 마늘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반대편에 걸려있는 건 옥수수인 거 같네요. 마루 위엔 밥솥, 쌀 독, '아기'가 집어들고 온 분꽃잎도 보입니다. '니나니 나니나' 입에 물고 놀았던 그 분꽃. 대문 밖 하늘은 노을로 물들어 있고....

 < 그림 넣을 예정 >

  끝.

덧붙임 : '넉 점 반'의 '점'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 4시30분, 네시 반을 가리킵니다. '키'를 모르는 이도 있을 거 같군요. 쌀에서 뉘를 골라낼 때 쓰는 겁니다. 키 위에 쌀을 퍼 담고 '키질'을 하며 뉘를 골라내지요. 오줌싸개에게 뒤집어 씌워 이웃집에서 소금 얻어오게 할 때 쓰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서울에선 보기 힘든 일이었네요. 쌀 씻을땐 조리를 썼습니다. 이남박에 쌀 씻으면서 조리질로 돌따위의 이물질을 골라냈지요. 제가 어릴때만해도 우리집에서 쓰던 이남박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였습니다. 키,조리,이남박. 기억을 한참 더듬어 찾아낸 정겨운 추억의 조각들입니다. 아, 윤동주가 쓴 '오줌싸개'란 시도 있네요. http://blog.daum.net/lubfu/6298193 마음 한구석 서늘해지는 작품입니다. 진짜,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