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들이'가 끝났다. 편집하면서 수없이 봤던, 그것도 '여러 버전'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던 그 프로그램이 끝났다. 허망하다? 아니다, 원래 방송은 그런 거니까. 결과(시청률, 기타)를 기다릴 뿐이다. 뭐, 그렇다고 시청률에 목숨 거는 거는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긴하다....

  방송사에 다니는 우리는 시청률표를 '성적표'라 한다. 공부(품질) 아무리 잘해도 성적표(시청률)가 좋지 않으면 '꽝'이다. 100점짜리 방송은 없는 법, 다양한 시청자의 입맛에 고르게 맞춰드리는 게 불가능한 까닭이다. 어쨌든, 나는 오늘 '너나들이'방송이 끝난 뒤 손톱을 깎았다. 조금 전에, 바로 아래에 있는 손톱깎기로....



  손톱 뿐 아니다. 이발 안 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머리는 새해에나 다듬을 거 같다. 이발하지 않고 손톱깎지 않는 거, '너나들이 성적표'를 의식해서이다. 참, 별 짓을 다했다. 내가 봐도 그랬다. 큰 일을 앞두고 저어하는 행위를 두고 흔히 '징크스'라 한다. 

  '징크스'는 '재수 없는 일. 또는 불길한 징조의 사람이나 물건'이나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 '좋은 뜻의 징크스'는 없다는 얘기. 징크스 바로 쓰기를 풀어가려하니 예전에 써 놓은 글이 하나 떠올랐다. 서기 2001년에 쓴 글. 제 뜻 모르고 마구잡이로 쓰는 외래어를 바로잡자는 뜻을 담은 글이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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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1,225미터에 너비 32미터인 6차로 다리. 1990년 6월에 준공한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국내 첫 사장교(斜張橋). 이 다리는 어떤 다리일까. 그렇다, 88 서울 올림픽을 뜻하는 높이 88미터의 주탑 4개가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는 올림픽대교이다. 이 다리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올림픽이 끝난지 13년만에, 다리 완성된 지 11년만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녹화중계된 군용기의 추락사고. 아까운 장병 3명이 숨졌다. 올림픽이 끝나고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넘겨 ‘괜한 짓’했다는 비난이 쏟아진 사건이다. 졸지에 세상을 달리한 군인 세 명과 100억이 훨씬 넘는 돈을 앗아간 지난 사고 현장은 밤마다 내가 뛰어 한강을 건너는 ‘달리기 코스’이기도 하다. 사고간 난 이튿날 밤에 나는 올림픽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24가닥 쇠줄을 매달고 무심히 서있는 다리의 주탑 바로 밑 난간은 사고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었다. 안타깝고 애통한 일이다. 사고를 전후해 방송과 신문에는 관련 기사가 이어졌다. 겉치레 행적을 남기려다가 무고한 생명과 100억원이 넘는 ‘헬기’를 잃게 되었다며 통탄하는 독자 의견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헬기’라고?

   헬-기(hel-機) - 외래어 헬리콥터를 줄여 쓰는 말이다. 주요 언론사의 기사검색 서비스를 통해 ‘헬기’란 낱말과 헬리콥터가 등장한 기사를 찾아보자.

	헬기	헬리콥터
‘가’방송	1,197건	199건
‘나’방송	555건	122건
‘다’신문	2,690건	814건

 

‘헬기’를 압도적으로 많이 쓰고 있다. 멀쩡한 외래어 헬리콥터를 두고 왜 신문과 방송은 ‘헬기’를 애용(?)하는 걸까. 글자수를 줄이기 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기사 제목에는 ‘줄임말’을 많이 쓰니까 말이다. 좋다. 백번 양보해 제한된 글자수에 뜻을 담아야 하는 제목은 인정해주자. 그래도 본문에까지 ‘헬기’타령하는 건 좀 생각해 볼 문제다.

   비(比), 말聯, 파(波), 화(和), 인니(인-尼).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폴란드, 네덜란드 그리고 인도네시아를 한자음으로 줄여 쓰거나 조합해 만든 말이다. 물론 제목에만 쓰는 표현이다. 구어체(口語體) 문장인 방송은 말할 나위 없고, 문어체(文語體)에 가까운 신문, 잡지에도 기사 본문에는 쓰지 않는 표현이다. ‘수카르노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인니(인도네시아)에서는...’이라거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고향인 파(폴란드)를 방문했다...’, ‘화(네덜란드) 출신인 히딩크 감독은...’ - 이렇게 쓴 기사를 본 기억이 내겐 없다.  ‘헬기’도 마찬가지 아닌가? 영어 헬리콥터(helicopter)와 한자 비행기(飛行機)의 앞과 뒤를 한자씩 잘라 붙인 조어(造語) ‘헬기’는 이제 남용되지 않았으면 한다. 헬리콥터가 싫으면 ‘잠자리비행기’라 하던가.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가뭄만큼이나 우리를 답답하게 했던 ‘헬리콥터 추락사건’의 잔상이 사라질 무렵 살빼기에 성공했다는 유명 연예인의 ‘다이어트 방법’ 공방이 튀어나왔다. ‘운동으로 살을 뺐다’는 주장과 ‘지방흡입 시술했다’는 폭로(?)가 팽팽히 맞서 이 시대 여성미(女性美)의 기준에 대한 논란까지 불러온 사건이다. 그럼 이 사건에서는 무엇이 문제? 말 그대로 ‘다이어트 유감’이다. 다이어트(diet)의 사전 뜻풀이를 보자.

diet :

－n.

1 일상 음식; 상용 사료; 음식(물), 식품, 식이. 2 규정[특별]식; 식이 요법.

3 (보통 a ~) 제한식, 감식. 미용식.

?be on a ~ 제한식[감식] 중이다.

?go on a strict ~ 엄격한 제한식을 하다.

－v. (~ed, ~ing) v.t.

1 …에게 (치료벌로) 규정식을 먹이다, 식이 요법을 시키다.

(금성출판사 영한 사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체중감량’이란 뜻은 없다. ‘다이어트’는 먹는 것과 관계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달리기로 다이어트 한다’는 표현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살을 빼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고 먹는 다이어트에 적당한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 

     뜻도 제대로 모르고 대충 둘러대 쓰는 ‘얼치기 외래어’가 또 있다. 바로 스포츠 경기의 ‘보이지 않는 힘’을 빗댄 표현 중에 하나인 ‘징크스’이다. 징크스 - 외래어는 분명한 데 정작 자신 있게 철자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낱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징크스’는 제대로 쓰이는 일이 별로 없는 ‘징크스’를 갖고 있다. 징크스?

   ‘월드컵 축구대회는 경기를 개최한 대륙의 나라가 우승한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다’,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에는 덩크슛을 먼저 넣은 팀이 이긴다는 징크스가 있다’, ‘경기 당일 아침 영구차를 보면 운이 좋다는 징크스가 있다’, ‘출근길에 *을 밟으면 횡재수가 있다는 징크스가 있다’ -- 이처럼 ‘징크스’는 널리 쓰이고 있다. 이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두루 애용(?)하는 징크스의 원 뜻은 뭘까.

   ‘Jinx’는 그리스의 마법에서 재앙을 불러내기 위해 사용했던 개미핥기새(wryneck)의 이름에서 유래한 낱말로, 불행이나 재수 없는 일을 야기하는 물건이나 사람을 뜻하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징크스’는 나쁜 상황이 반복되는 경우만을 의미한다.  ‘(불운을 가져오는) 재수 없는 것(사람), 불운, 불길’(동아 출판사 영한사전) -- 징크스의 뜻과 쓰임새는 사전의 풀이를 보면 보다 확실해 진다. 내친김에 어렴풋한 짐작만으로 제 뜻을 버려둔 채 오남용(誤濫用)하는 친근한(?) ‘얼치기 외래어’를 더 둘러보자. 

   ‘네고’ -- 말의 생김으로 봐서 토박이 말이 아님은 분명한데 영어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네고(nego)'란 낱말은 찾을 길이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네고’는 영어 ‘니고우시에이션(negotiation)'에서 머리만 잘라 놓은 일본투 줄임말인 까닭이다. 국적불명의 ’네고‘는 ’협상, 교섭‘이란 말로 당장이라도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다. ’네고‘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세일즈맨에게는 늘 ’클레임‘이 걸리는 ’징크스‘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서기2001년 6월, '방송과 문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