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선생이 남긴 그 유명한 '주도유단'입니다.
얼마전 한 신문에서 본 뒤 공감하는 바 있어 몇마디 끼적이려했는데 불발에 그쳤지요. 그래서 다행? ㅋ 아닙니다. 호시탐탐(?) '술판'을
노리며 사는 몇몇 인사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오늘 또 제 눈에 띄었습니다. '전문' 올립니다. 일단 읽어보시고, 머리 끄덕일 수 있는지 곱씹어
보시기 바라옵니다. '< >'안의 한마디는 제가 붙인 '주석'입니다. 이리봐도 저리봐도 조지훈 선생과 저는 견줄 수 없는 거, 확연히
드러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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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주도유단(酒道有段)'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 현사(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酒道)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술을 마시는 연륜이 문제요, 둘째,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의 높이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1)
부주(不酒)-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 9급
<
제가 썩 반기지 않는 부류입니다. '마실 줄 알지만 마시지 않는다',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
2)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 8급
<
어설프게 술과 더불어 사는 이들이 가끔 겪는 '문제상황'입니다. 아직 겁내본 적은 없습니다 ㅋ>
3)
민주(憫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 7급
<
'어찌 취하느냐'가 문제지요. 동반자에게 부담될까 저어하는 이,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유감입니다 >
4)
은주(隱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 6급
<
'돈이 아쉬워'술을 숨어 마신 적, 없습니다. 술값 아끼려 허름한데 찾은 적은 있습니다>
5)
상주(商酒)-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이익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 : 5급
<
'이익 좇아'술 마시면 재미없게 취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술자립니다. 손해보며 술 마시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아직은....?
>
6)
색주(色酒)-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 4급
<
할 말이 없습니다. 일부 의학계 임상결과를 보면 과도한 음주는 삐리리~ 랍니다 >
7)
수주(睡酒)-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 3급
<
알코올 중독 초기증세라고들 합니다. 이런 경험, 없지 않습니다. 매일 마시면 이럴 일 없습니다 ㅎㅎ >
8)
반주(飯酒)- 밥맛을 돋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 2급
<
나이 들면서 알게되는 '새로운 세상'이지요. 찌개를 보면 소주 생각하는 거, '세상 탐험'의 시작입니다 >
9)
학주(學酒)-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 주졸(酒卒) : 1급
<
이제 비로소 '진경'으로 들어서는군요. 저는 아직 멀었나 봅니다~ >
10)
애주(愛酒)-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도(酒徒) : 1단
<
술을 '취미'로 맛 본다? 부럽습니다 . 국어사전엔 '주도 = 주당'으로 풀이했군요 >
11)
기주(嗜酒)-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주객(酒客) : 2단
<
'즐길 기'를 쓰는군요. 노인(老)이 입(口)으로 날(日)마다...의 뜻이라 풀이한 이도 있습니다. 즐길 기(嗜) + 술 주(酒). 주객,
2단은 도달하기 쉽지 않을 듯 합니다 >
12)
탐주(耽酒)-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주호(酒豪) : 3단
<
이제야 '진경을 체득'한 단계? >
13)
폭주(暴酒)-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 4단
<
국어사전에는 '폭주 = 폭음'으로 올라있네요. '수련하는 이'의 폭음이라....>
14)
장주(長酒)- 주도 삼매에 든 사람. 주선(酒仙) : 5단
<
갈수록 이해하기도 힘든 수준입니다. '주선'이라니....>
15)
석주(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 6단
<
과유불급이라, 아끼며 사는 삶. 넘치지 아니하고 술도 인정도 자제할 줄 아는 수준? 이 단계에는 이르고 싶군요 ^^
>
16)
낙주(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주성(酒聖) : 7단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했던 윤심덕의 읊조림, 기억하시나요? 유유자적의 단계는 실로 '비움으로 채움을 아는' 범접하기 어려운 높이입니다.
부럽다. 그리고 그립다~ >
17)
관주(觀酒)-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 주종(酒宗) : 8단
<
'이틀 안 마시면 평생 마실 수 있다'는 한 마디가 떠오릅니다. 술은 곁에 있으나 마실 수 없는 단계. 그에 이르지 않기 위해 술을 제자해야
하는 게 '주당의 도리'일까요. 아니면....? >
18)
폐주(廢酒 : 열반주(涅槃酒))-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 9단
<
끝내 '열반'에 오르는군요. 저 세상에는 술로 인한 부대낌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ㅠ.ㅠ >
부주,
외주, 민주, 은주는 술의 진경, 진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상주, 색주, 수주, 반주는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 술이니 술의 진체(眞諦)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 초급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반주는 2급이요, 차례로 내려가서 부주가
9급이니 그 이하는 척주(斥酒) 반(反)주당들이다.
애주,
기주, 탐주, 폭주는 술의 진미, 진경을 오달한 사람이요, 장주, 석주, 낙주, 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 번 넘어서
임운목적(任運目適)하는 사람들이다. 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의 초단을 주도(酒道)란 칭호를 줄 수 있다.
기주가
2단이요, 차례로 올라가서 열반주가 9단으로 명인급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을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주도의 단은 때와 곳에
따라, 그 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갈등이 심하다. 다만 이 대강령만은 확고한 것이니 유단의 실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기백만 금이 들
것이요, 수행연한이 또한 기십 년이 필요한 것이다. (단 천재는 차한에 부재이다.)
요즘
바둑열이 왕성하여 도처에 기원이다. 주도열(酒道熱)은 그보다 훨씬 먼저인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쇠미한 적이 없지만 난세는 사도(斯道)마저 추락케
하여 질적 저하가 심하다. 내 비록 학주(學酒)의 소졸이지만 아마추어 주원(酒院)의 사범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건만 20년 정진에 겨우 초급으로
이미 몸은 관주(觀酒)의 경에 있으니 돌돌 인생사 한도 많음이여!
-1956년
3월 <신태양>지에 발표한 조지훈의 음주론 '주도유단(酒道有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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