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꽂힌다니, '뽕'했냐고? 2006.02.20 나는 영어영문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전공'이 영문학은 아닌 거 같다. 그래서 그냥 나는 '영문과를 나왔다'는 말만 한다. '전공인'의 소양이 모자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문도 모르고' 입학해 졸업한 거는 아니다. 뭐, 불문과는 입학 동기를 '불문'에 붙이거나 스스로 '불교문학'한다 하기도 했다. 그때 외국어문학과 학생들의 우스개였다. 그래도 영문과를 나왔으니 가끔 전공분야에서 아는 척을 하기도 한다. 다른 학문은 잘 모른다. 다른 학과의 '학사 수준'의 지식은 물론 없다. 아는 게 있다쳐도 상식 수준을 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말은 잘 안다. 전공이 아니어도 우리말과 글은 우리 문화를 담는 그릇이고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수단'인 까닭이다. 서론이 길어질 조짐, 내 나쁜 버릇이 또 나오려 한다. 본론은 이렇게 시작하자. "요새 청소년들은 끄덕하면 '필'이 꽂히고 '팬시'숍을 즐겨 찾는다는데, 필자는 젊은이들이 곧잘 약(Pill)에 취하고 여성용품(pansy) 가게에 잘 간다는 뜻으로 알았다." 오늘자 아무개 경제신문 칼럼에 실린 내용이다. 이 글을 쓴 이는 경제학과 교수. 그 분야에서는 '고수'이리라 믿는다. 경제학과 고수가 위 대목에 빗대어 풀어낸 주장은 '한글의 외래어 표기와 세계화'이다. 그 '주장'을 짐작하는 이, 있겠지? '영어의 에프(F)는 우수한 한글자모로 제대로 표기할 수 없다. 피(P)와 같이 표기하는 거는 국제화 시대에 심각한 문제다. 세종대왕이 안다면 기가 막힐 일이다. 에프를 표기할 한글자모를 어서 만들자....' 이런 주장이다. 일리있다? 그래, 일리는 있다. 일리(一利, 한가지 이익)만 있을 뿐이다. 그에 동조하는 이들의 만족이 바로 그쯤 되겠다. 그렇다면, 그 게 '일리(一理)가 없다'는 너의 주장은 무엇이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하자. '외래어 표기'는 외국인을 위한 게 아니다. 더욱이 특정지역인을 위한 게 아니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과 중국 따위의 나라 사람을 위한 게 아닌 '우리말을 쓰는 사람', 곧 한국어와 조선어를 쓰는 우리를 위한 것이란 얘기다. 영어의 특정발음 음가를 밝히기 위해 우리 자모를 바꾸어야 한다? 아니다. 나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좋다. 미국이 '지구의 대장나라'이니 에프를 표기하는 자음을 만든다 치자. 그러면 끝나는가. 아니다. 브이(V)도 있고, 시(C)도 있다(우리말 '시(씨)'와 영어 '시(C)'의 발음은 다르다). 숱한 모음의 차이는 또 어찌할 건가. 또, 모든 자음과 모음을 '영어 발음에 일치'시킨다 치자. 영어의 중요한 발음요소인 악센트와 장단음 표기는? 한마디로 대책이 없다. 그래서 위 경제학자의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에서 비롯했다.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에는 순경음 비읍과 반치음, 아래아가 있었다. 그게 없어진 까닭은 뻔하다. 우리 말글 생활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말(글)은 물 흐르듯 변천한다. 필요하면 생기고 그렇지 않으면 없어진다. 그걸 누가 강제하겠는가. 다시 짚어보자. 외래어표기는 한국어를 쓰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컴퓨터와 휴대폰에서의 한글 문자 입력 속도는 일본어나 한자는 물론 로마자 보다도 빠른(위 경제학자의 얘기다)' 이유는 한글의 우수성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히 맞다. 근데 에프와 브이, 기타 자모를 자판위에 더 새겨넣는다면? 결과는 어떨까. 그건 일종의 '퇴보'가 된다. 영어는 로마자로 제대로 쓰고 발음하면 된다. 일본어 제대로 하려면 '가나'를 익혀 써야 하고 중국어 또한 '간체'와 '번체'를 익혀 그 동네에 맞게 발음하며 소통하면 될 일이다. 내 말이 틀린가? 덧붙임 : 위 경제학자가 쓴 글에 나온 표현 '끄덕하면'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아마 '툭하면'을 잘못 쓴 거 아닌가 싶다. '팬시(pansy)'가 여성용품이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전에 내가 알던 뜻은 꽃이름 팬지 뿐이다. 덕분에(?) 같은 낱말이 '왕의 남자' 곧 동성애(자)란 것도 배웠다. 참, pansy를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옮기면 팬시가 아니라 '팬지'가 맞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