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 피투성? 2009.09.27   '우리말로 철학하기' 또는 '우리말로 학문하기'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철학 따위의 학문을 우리말로 한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은 온갖 것들은 우리말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따라 올 게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대로 된 우리말로 학문한 적은 거의 없다'이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내는 '새국어생활'이란 잡지가 있다. 철마다 나오는 계간지이다. 지난 봄 호에는 작가 장승욱이 외국어대학교 철학과 이기상 교수를 만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그 중에 한 대목을 간추려 함께 보려한다.   서양에는 근대성을 이룬 혁명적인 사건이 네가지가 있다.  종교개혁, 르네상스,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이다. 종교개혁은 자기 언어를 찾으려는 언어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 네가지 사건 이전에는 라틴어만을 학문언어로 생각했다. 성서도 라틴어로만 쓰여야 하고 다른말로 번역하면 사탄의 자식이라고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는 곧 지배층이 언어를 독점해서 민중을 마음대로 부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근대성은 언어 혁명이고, 자기 언어를 찾는 것이다....      철학작품을 가장 먼저 제 나라 말로 쓴 나라는 영국이다. 홉스, 버클리, 흄 등이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철학 논문을 쓴다. 그 다음에 프랑스에서도 데카르트가 프랑스어로 논문을 쓰기 시작한다. '성찰'은 라틴어로 썼지만 '방법서설'은 프랑스어로 썼다. 독일은 좀 늦었다. 칸트는 박사학위 논문을 라틴어로 썼고 예순이 넘어서 쓴 '순수이성비판'이 독일어로 쓴 최초의 철학 책이다. 이렇게 자기 나라 말로 글을 쓰면 글 속에 세계관이 드러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유럽의 근대성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은 서구화와 산업화만 생각했기에 근대성은 깊이 생각된 적이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1443년이다. 종교개혁 70여년 전에 세종대왕이 종교개혁과 비슷한 언어혁명의 취지로 문자를 만들었는데, 양반들의 반대가 심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근대성의 싹은 한국에서 먼저 돋았지만, 시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동학혁명도 있었지만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언어를 통한 세계관의 개혁이고, 언어를 통해 잃어버렸던 우리 얼을 되찾고, 세계를 보는 눈을 되찾는 일이다. 요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번역하고 있다. 국내 번역본은 하나같이 일본번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중역(重譯)이다. 독일어의 'Geworfenheit'를 '피투성(被投性)'이라고 번역했다. 일본이 한자로 옮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거다. '우리말로 철학하기'의 한 방법으로 '내던져있음'이라고 나는 번역했다.   우리말 속에 담겨있는 세계관, 그 세계관이 펼쳐지고 있는 우리 문화, 그리고 그 우리 문화가 지구촌 시대에 세계인의 관심을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고 생각을 넓혀가고 있다.                                                         <새국어생활, 2009년 제 1호, pp121~130>   이기상 교수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와 동료들이 엮어가는 '우리말로 철학하기'란 책을 접한 적은 있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제목에 끌려 사들인 책이다. 강단의 학자들은 '우리말로 학문하기'에 힘쓰는데 언중과 밀착해있다며 떠벌리는 언론인은 '우리말로 방송'하고 '우리말로 기사 쓰기'를 하고 있는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