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노인이라서라기 보다는 우리 민족 자체가 아침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나도 그렇고 다들 일찍 일어나요.
나도 네 시면 일어나요.
그때 일어나면 혼자 개발한 명상을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명상이라고 하기도 뭐하네.
약 한 시간을 아무 생각도 안하고 그냥 릴랙스 하고 있어요.
퇴근 시간 이후 약속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없어요.
술도 못 먹기 때문에 오후 6시 이후에는 집에 있는 거지.
전업주부였다면 아내가 싫어했겠지만, 문학교수여서 그나마 이해하는 부분이 있긴 해요.
그래도 어디서 그랬더라구.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하...
집에 있는 시간이 많긴 한데 각자 서재를 쓰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집사람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진 않아요. 집사람과 이야기 하더라도 일상생활 이야기 보다는 지적인 대화를 많이 합니다.
인간은 대화를 할 때 가장 창조적이 되니까요.
우유성(偶有性)이라고 하지.
대화를 하면서 뇌가 가장 활발히 반응하는 거에요.
두 사람이 대화를 하면서 지적이고 창조적으로 되면서 나도 모르던 이야기가 나오고 새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근데 우린 남의 이야기나 험담, 가십, 땅 값 오르고 뭐 그런 이야기들을 주로 하지요.
그러면 머리가 맑아지는 게 아니라 혈압이 올라.
그렇다고 또 지적 대화를 시도하면 다른 사람들과 못 어울려. 아는 체한다 잘난 척 한다 그런 소리나 듣는 거지. 우리는 대화가 없는 문화에서 살고 있어요.
비타민 결핍증처럼 대화의 결핍이 생기는 거야.

 
하루일과의 시작에 대한 질문이 어느새 지적인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가 있었다. 지적인 대화를 즐기시는 교수님의 대화의 세계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순간, 두 번째 질문을 던져보았다. 70여년 무신론자였던 그가 하루 아침에 종교를 가지게 된 이야기. 들어본 이야기기는 하지만 교수님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그 질문 진짜 많이 받았는데 왜들 그렇게 궁금하지 모르겠어요. 아~ 지금까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경험했거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죠. 한국인으로 왜 태어났는지 모르듯 죽음도 미스테리 같은 거야. 생명이 뭔지 탐구해야 하는 지성인으로 자기 생명의 근원을 찾기 위해 칠십 평생 지식을 탐구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해답을 못 찾았어요. 내가 안 해 본 건 종교, 바로 영적인 접근인 거지.
물론 계기가 있긴 했지.

우연히 계기가 왔어요. 내 딸이 새벽기도 하러 나가는데 투명한 햇빛을 받으며 나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어. 그 전날까지도 믿지 않겠다고 했던 내가 당장 세례를 받겠다고 딸에게 외치게 된 거지.

 
그날의 햇빛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그 이야기를 하는 교수님의 얼굴에도 그날과 같은 투명한 햇빛이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고 하면 우연일까?
비교적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그 속엔 지난날의 희로애락이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교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교수님이 초등학교 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다 아는데, 그럼 싸움의 상대편인 일본 배는 뭐였을까 알고 싶어 선생님께 질문했다가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혼났다는 이야기. 싸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이순신 장군이 대단해 질 수 있는 건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어령 교수님의 어린 시절이 기발하고 재밌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남들이 생각지 못한 부분에 관심을 가진다는 교수님의 성장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가 센서티브하신 분이어서 책을 참 좋아하셨지요. 아들만 다섯인 집의 막내인 내가 어렸을 때 많이 허약했었는데, 아들을 간호하면서도 아들이 잠깐 잠들면 그 사이에 책을 보셨어요.
그래서였는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을 깨치고 책을 많이 읽었어요. 세계 문학 전집을 초등학교 때 다 읽었을 정도니까. 파우스트 같은 책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어려워도 계속 읽었어요.
그게 오늘날 나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키워낸 거에요.
반면에 아버지는 그 당시에 비닐하우스 속성 재배를 하셨을 정도로 신기한 기계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러다보니 기계를 만질 기회가 많아서 지금도 웬만하면 메뉴얼을 보지 않고 기계를 다룰 정도니까.
컴퓨터도 혼자 배웠어.
내 경우엔 좌뇌와 우뇌가 동시에 발달했는데, 좌뇌는 아버지, 우뇌는 어머니로부터 유전적 영향을 받은 것 같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다리 주물러 달라고 했을 때 창조적이지 않고 일상적인 반복을 싫어했던 난 잘 해드리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그저 자식과의 스킨십을 원했던 건데 그걸 모르고 못해 드린 게 지금도 후회야.
어머닌 나에게 종교 같은 존재에요.
어머니로부터 받은 게 많지요.
또 남에게 베푸시는 걸 좋아하셨던 아버지로부터는 물려받은 재산은 없지만 아무것도 안 남기셔서 형제들 간에 싸울 것이 없잖아? 그게 바로 아버지의 유산인 거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오늘의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거에요.
재산 많이 물려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일본이 현재 40세 이상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세계에서 최고인데, 그만큼 상속을 잘 못하면 그 나라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말과 글, 생각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교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간만에 수준 높은 질문을 내놓았다. 지적인 대화를 즐기는 교수님은 이 질문을 반갑게 맞이하며 거침없는 답을 주신다.

생각을 글로 쓰려고 하면 엉뚱한 게 나올 때가 있고, 생각보다 말이 앞서는 경우가 많죠.
말이 앞서는 건 나의 결점이기도 하고 하하하...
김소월 시인의 “그립다 말을 할까하니 그리워 지더라” 랄까?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강연을 하면서 생각을 합니다. 말을 하는 것이 곧 생각이에요.
말을 통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르는 거지요.
펭귄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려면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멈칫해요.
먹이도 있지만 적도 있으니까 주저하는 거지.
그러다 한 놈이 먼저 뛰어 들어가면 다른 펭귄도 함께 뒤이어 들어가는 거야.
그게 바로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지요. 내가 퍼스트 펭귄이라고 할 수 있죠.
신한국인, 벽을 넘어서...
이런 말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에 내가 처음 쓴 말들이에요.

 
새천년을 기념해 2000년 1월 1일 0시에 우리 대한민국의 방송을 통해서 즈믄둥이의 울음소리를 전 세계에 들려주었던 아이디어의 기발함에 놀랐는데, 그게 교수님의 아이디어였다니 역시 퍼스트 펭귄 이어령 교수님이시다. 해보지 않아 두렵다고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없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본다. 퍼스트 펭귄이고 싶지만 뛰어들 바다가 없다고 아쉬워 하시면서도 끊임없이 샘솟는 아이디어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공항인 인천공항엔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어요. 그럼 이야기를 만들어야지. 취항하는 각국의 나라꽃을 심는 거에요. 외국인이 남의 나라 공항에서 자기 나라꽃이나 주화를 보면 얼마나 반갑겠어? 그러면서 명실상부한 세계 공항으로 인식되는 거지. 근데 아이디어를 줘도 이뤄지지 않으면 상처를 받게 되니, 자꾸 소극적으로 변하네. 그래도 퍼스트 펭귄이 많아져야 해요! 

끝으로 우리 유부 같은 후배 여성 언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역사 속에 현장 속에 살고 있으니 선택된 삶이에요. 여성의 권리가 과거에 비해 커지기는 했지만, 그 위치는 아직 낮아요. 남성과 여성 할 수 있는 일은 비슷해도 롤은 조금씩 다릅니다. 아무리 봐도 여성이 섬세한 면이 많고 남성들이 놓칠 수 있는 부분, 숨겨져 있는 문제들에 강합니다. 생명이나 교육에 관한 일들, 사회에 드러나 있지 않은 것들을 여성들이 파헤쳐야 합니다. 특히 미디어 쪽에서는 더 할 일들이 많을 겁니다. 여성들만의 블루 오션을 찾으세요!

약속된 시간을 훌쩍 넘긴 교수님과의 인터뷰,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만나서 다시 하자는 교수님은 다음 일정을 위해 사무실을 떠나셨다.
교수님의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도 다 준비된 바탕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여러 가지로 자극이 된다.
오늘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나마 억눌려 있던 우리의 창조성이 조금은 깨어났겠지?
우리 유부들도 블루 오션 속에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기대하며 이어령 교수님과의 다음 만남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