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줏간 = 변소 또는 개집, 혹은 부엌? 2009.05.11 '골든 벨'을 들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상식 대결'의 마당을 펼치는 프로그램이다. '퀴즈 아카데미'와 '장학퀴즈'를 맡았던 내가 관심 없을리 없다. 근데, 보지 않고 들었다? 저녁 시간, 밥상머리에 앉아 화면은 보지 않고 소리만 들었단 얘기다. 텔레비전은 꼭 보는 것만은 아닐 만큼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거, 확실하다. 앞 단계 문제 중의 하나로 '푸줏간은 무엇'이란 게 나왔다. 답을 보니 별 게 다 나왔다. 변소(화장실), 개집, 부엌, 짐승 밥 주는 곳.... 한마디 우리 생활 속에 없으면 안 될 곳,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이 답으로 나왔다. 푸.줏.간.... 답은 '정육점'이다. '고깃간'이란 말도 한 뜻이다. 고등학생이 푸줏간을 모른다. 그래서 무식하다? 글쎄, 푸줏간 모르는 게 무식한 것일까. 세상살다보면 '정육점'만 알아도 지장없으니까. 동의어, 유의어 많이 아는 게 생존, 더 나아가 '출세'와 직결되지 않는 게 이땅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도, 문제 있다.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 온갖 카드 게임의 캐릭터 이름과 필살기는 줄줄이 꿰면서 정작 '일상용어'는 모른다. 말은 변하는 것, 푸줏간도 옛말이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이런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아들에게 물었다. 푸줏간이 뭔 줄 아니? 즉답이 나온다. 고기 파는 곳, 정육점. 우리 아이들의 '말과 글'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아빠와 엄마가 하는 말, 책에서 챙겨 익힌 표현, 방송에서 주워들은 한마디가 곧 교육이다. 고등학생이 푸줏간도 모르다니, 이런, 쯧쯧.... 하지 말자, 어른들아. 일요일 저녁, 많은 이들이 보는 프로그램에 나온 '푸줏간의 뜻'. 예전엔 미처 몰랐어도 이제 알고 지내면 된다. 아이들은 어른을 본받지만 때론 어른이 아이들을 거울 삼아야 한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반듯하고 큰 그릇이 제대로 된 뜻을 담을 수 있다. 깨지고 모난 그릇 - 우리 어른들의 것이 아닌지 곱씹어 볼 일이다. 끝. 덧붙임 1 : 푸줏간의 어원을 연세대 홍윤표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줄여실음, 글쓴이 주> (전략) ....'푸줏간'이 '푸주 + ㅅ + 간(間)'으로 분석될 것이라는 것쯤은 '방앗간, 기찻간, 마굿간' 등의 단어 구조를 떠올리면 금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ㅅ'과 '간(間)'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푸줏간'의 '푸주'는 원래 한자어였다. 15세기에 한자 '포주(廚)'로 쓰이었다. 그 한자음은 '포듀'이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그러한 용례가 보인다. (중략) 이 '포듀'(廚)가 구개음화를 일으켜 '포쥬'가 되었다. 그리고 '포쥬'의 '쥬'가 '주'로 변화함으로써 '포주'로도 사용되었고, 한편으로는 '포'()의 음이 '푸'로 변화하여 '푸쥬' 또는 '푸주'로도 쓰이었다. '포'가 '푸'로 변화하는 시기는 19세기 말인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에 '포주'와 '푸주'가 동시에 쓰이는 것으로 보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중략) 결과적으로 15세기의 '포듀'가 오늘날 '푸주'로 어형이 바뀌었고, 그 뜻도 '고기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로 변하였다. 그런데 이 '푸줏간'이 언제부터 '정육점'(精肉店)으로 변화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20세기 초기의 국어사전에는 '정육점'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1960년대의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바로 직전에 일본에서 들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일본어에서는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임 2 : 푸줏간의 예에서 보듯이 토박이 말이 사라지고 (일본투)한자어가 주인행세 하는 낱말이 많이 있다. 연모, 얼개, 흰자질..... 앞으로 또 어떤말이 이렇게 사라질지 모른다. '종의 멸종'만 심각한 게 아니다. '언어의 멸종', '언어통합의 가속화'에 대해 관심 있는 분은 '사라져가는 목소리들(Vanishing Voices)'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책값이 좀 비싸긴 하다. 진짜, 끝.